Загрузил Александр Сергеевич Овчинников

제국주의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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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후무한 대규모 파병이 현실로 옮겨진 것이다.
제국주의 전쟁이라는 허구
이국 전장에 자국 군대를 보내기 위해서는 예나 지금이나 국가적 결단이
필요하다. 우리나라도 1 % 0 〜1970 년대 베트남 전쟁 파병이나 최근의 이
라크 파병을 결정할 때 ‘국익’ 이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이었다. 그렇다
면 7 세기 일본도 ‘국익’ 을 고려했을 텐데, 과연 그들은 무엇을 얻으려 했
을까? 먼저 일본 학계가 주장하는 참전 이유를 살펴보자.
일본 사학계에서는 이미 1920 년대부터 백강구 전투에 대해 연구했
다. 현재 서점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관련 서적만도 여섯 종류인데,
그중 2 만 부 이상 팔려나간 베스트셀러는 도야마 미츠오遠山美都男가 쓴
《
백 촌 강 一 고대 동아시아 대전大戰의 수수께끼〉(1997)다. 가쿠슈인 대학
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역사학자 도야마 미츠오는 일본의 속국이던 백제
가 당나라의 공격으로 패망하자, 이를 되찾기 위해 일본이 백강구 전쟁
을 벌였다고 주장한다. 한반도 위에 군림하려는 대국大國으로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해 일본이 군사적으로 개입했다는 말이다. 일본이 백제와 신
라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이 주장의 핵심이다.
이는 비단 도야마만의 주장이 아니다. 역사학자 이시모다 쇼石母田正
의 저서로, 백강구 전쟁 해석의 고전으로 손 꼽 히 는 《
일본의 고대국가》
(1971)는
백강구 전쟁을 고대 제국주의 전쟁으로 규정한다. 신라를 사실
상의 속국으로 거느린 강대국 당나라의 대大제국주의와 백제 및 고구려
의 조공을 받던 일본의 소小제국주의가 맞붙은 전쟁이라는 말이다. 고대
한반도만큼은 일본의 영향력 아래 있었고, 일본이 한반도의 나라들보다
상위 였다는생각이 일본 학계에서는뿌리 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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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한 몸으로 직접 한반도 정벌에 나섰다는 전설 속 인물 진구 황후(
왼쪽)
.
진구 황후를 기리는 후쿠오카 소재 가시이쿠 신사의 삼나무와 함포(
오른쪽)
. 삼나무는 진구 황후가 직
접 심었다고 하고, 함포는 1922년 데이메이 왕후가 침략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하사했다. 그러나
진구 황후는 역사적 인물이라 보기 어렵다.
이 같은 주장의 밑바탕에는 역시 4 세기 일본의 야마토大和 조정이 한
반도 남부 지 역을 점령했다는 임나일본부任邪日本府설이 자리 잡고 있다.
일본의 지배를 받던 한반도를 당나라가 침공하자 여기에 대응했다는 주
장이다. 임나일본부설의 주인공은 임신 중인 몸으로 직접 한반도로 건너
가 신라를 정벌했다는 진구神功 황후다. 진구 황후를 이길 수 없다는 사
실을 안 고구려와 백제가 조공을 맹세했다는 이야기를 많은 일본인들이
사실로 믿는다.
진구 황후를 기 리는 후쿠오카시 소재의 가시이쿠香推宮 신사에는 진
구 황후가 한반도 정벌을 마치고 심었다는 삼나무도 있다. 또한 일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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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국주의 일로로 치닫던 1922년 무렵 데이메이貞明 왕 후는 이곳에 함포
艦砲를 하사했다. 한 반 도 침략을 정당화하려는 일본 역사의 상징이 바로
‘진구 황후’ 였다.
한편 일본의 원로 사 학 자 나오키 코지로直木孝次郞 오사카시립대학교
명예 교 수 는 여기에 반 론 을 제기한다. 일본 고대 역사와 천 황 을 연구한
《일본 고대의 씨 족과 천황》(
1964)
에 따르면, 진구 황후의 한 반 도 정벌론
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며 백강구 전쟁을 토대로 한 전설이다. ‘진구神功’
라는 호칭 자 체 가 8세기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옛 문 헌 을 찾아보면 진구
황 후 는 오 키 나 가 노스쿠네息長宿彈命의 딸 오 키나가 타 라시 (
息長帶 또는 氣
長足)
인데, 아버지 오 키나가 노스쿠네의 생 몰 연대는 321〜 384년이다. 그
런데 (일본서기)에 따르면 진구 황 후 는 289〜 389년까지 101세 를 살았다.
아버지보다 먼저 태어난 기록이니 타당하다 볼 수 없다.
더구나 진구 황 후는 쥬아이仲哀왕의 부인이었다는데, 일본 학 계 는 이
쥬아이왕의 존 재 도 의심한다. 이른바 ‘쥬 아 이 왕 가공설’ 이다. 쥬 아이왕
의 아 버지라는 야마토 다케루노 미고토日本武尊는 신화에 나오는 영웅으
로, 후대의 기록에 따르면 2세기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대체로 일
본 학 계 는 야마토 다케루노 미고토가 4 〜 7세기경 활 동 한 야마토 정권의
영웅을 가공한 인물이라 본다.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신화와 전설에 나
오는 영웅이라는 말이다. 허구적 사 건과 인물을 이야기하기 위해 쥬아이
왕을 만들어냈고, 이러한 내 용 이 《
고사기古事記)
와 《일본서기 日本書紀)에
편입된 것이다.
더구나 역사적으로 타 라시 (
帶그足)계통의 이름은 7 〜 8세기 들 어 서야
나타난다. 죠메 이針明왕이 ‘오키 나가 타라시 히히로누카息長足 日廣額’ 로,
사이메이 여왕이 ‘아메토요 타카라이 카시히 타라시天豊財重日足’ 로 등장
한다. 그 러므로 진구 황후의 이름과 존재 자체 도 7 〜 8세기에 만 들어졌을
백제 부흥의 꿈, 백강구 전투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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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성이 크다. 코지로 교수는 이 이야기가 부흥 백제 구원병을 격려하
기 위해 지은 전설이라 본다. 진구 황후와 사이메이 여왕이 여성이라는
점, 이름이 모두 타라시 계통이라는 점, 한반도로 출정했다는 점이 완벽
하게 닮았기 때문이다.
백강구 전쟁이 한반도 식민지를 회복하기 위한 제국주의 전쟁이었다
는 일본 학자들의 주 장 은 《일본서기》의 기록에서도 반 박 된 다 .《일본서
기》에는 백강구 전쟁 파병 동기가 ‘왕이 복신의 뜻에 따랐다’ 라고 기록
되어 있다. 백제 부흥군의 요청에 따라 파병했다는 뜻이다. 중국 역사서
(
구당서舊唐書)에도 당시 파병군이 ‘부여풍의 무리’ 였다고 나온다. 당나
라가 백강구에 온 왜군을 백제 왕자 부여풍이 이끄는 무리, 곧 백제 군대
로 인식한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일본은 왜
백제 부흥군을 도왔을까? 이번에는 백강구 전쟁에 어떤 병사들이 참전했
는지를 통해 알아보자.
나는 조국을 위해 칼을 들었을 뿐!
아스카에서 오사카로 거처를 옮긴 뒤 본격적으로 파병 준비에 나선 사이
메이 여왕의 행보는 (
일본서기》에 상세하게 나온다. 여왕은 친히 배를
타고 오카야마岡山, 에히메愛쪼를 거쳐 후쿠오카에 도착했다. 그리고 오
늘날 효고兵庫현 중서부에 해당하는 옛 기비吉備 지역에 머물렀다.
그때 이곳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았을까? 이 지역의 대표적인 신사인
기비츠히코吉備津 신사에서 그들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다. 기비츠히코
신사에는 이 지역의 고대 최고 통치자였던 ‘우라溫羅’ 를 기리는 의식이
아직도 남아 있다. 역사와 환상이 잘 버무려진 ‘우라’ 에 얽힌 전설을 한
번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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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라 전설의 배경인 기비츠히코 신사(
왼쪽)
와 우라가 근거지로 쌓았다는 키노조성의 모습(
오른쪽)
. 전
설은 철 생산지인 기비 지역에 제철 기술이 뛰어난 백제인이 정착했음을 뜻한다.
옛날 기비 지역에 백제 왕자를 자처하는 우라가 나타났다. ‘기비노카
쟈吉備冠者’ , ‘카시느우라禍义溫羅’ 등으로 불리는 우라는 전설상 기괴한 존
재로, 범이나 이리처럼 눈이 빛났으며 산발한 머리카락은 타오르듯 붉었
다. 4미터에 달하는 커다란 키에, 머리에는 혹이 나 있었고 요술을 부려
입에서 불을 토하고 변신에도 능했다.
우라는 이곳에 키노조鬼2 성(
오카야마현 소자總社시)
을 쌓아 근거로 삼
고, 서쪽 지방에서 수도로 보내는 공물을 약탈하거나 부녀자를 희롱하는
등 횡포를 부렸다. 이에 조정은 토벌군을 보냈지만 우라를 이기지 못했
다. 그래서 조정은 기비츠히코 노미코토吉備津産命를 파견했다. 우라는
바위를 던지고 기비츠히코 노미코토는 활을 쏘며 싸웠지만 좀처럼 승부
가 나지 않았다. 돌과 화살은 오늘날 기비츠히코 신사와 키노조의 중간
지점에 떨어졌다.
기비츠히코 노미코토는 꾀를 내어 한 번에 화살 두 대를 쏘았다. 기
운이 떨어진 우라가 이를 막지 못해, 화살에 왼쪽 눈을 맞았다. 이때 우
라의 눈에서 흘러나온 피가 강물을 시뻘겋게 물들였다. 다급한 우라가
백제 부흥의 꿈, 백 강구 전투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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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노조성(
왼쪽)
은 부여 나성(
오른쪽)
과 같이 토성을 쌓고 밖을 돌로 보강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이
는 백제의 토목 기술이 일본 기비 지역에 전해진 증거다.
꿩으로 변신해 도 망 치 자 기비츠히코 노미코토는 매 가 되어 뒤쫓았다. 우
라가 잉어로 몸 을 바꿔 달아나자, 기비츠히코 노 미 코 토 는 사 다 새 (
펠리
컨)
가 되어 우 라 를 잡았다.
기비츠히코 노 미 코토가 우라의 목 을 쳤지만 신음 소 리 가 계속 났다.
신음 소리 때문에 개에게도 우라의 살 을 먹일 수 없었다. 고민하던 기비
츠히코 노 미 코토는 기비츠궁의 부 뚜 막 쇠솥 아래 우라의 시신을 묻었다.
하 지 만 그 뒤 13년 동 안이나 신음 소 리가 계속 쇠솥을 울렸다. 그러던 어
느 날 기비츠히코 노 미 % 꿈에 우 라 가 나타나 말했다.
“쇠솥으로 신에게 바치는 밥을 지어라. 좋 은 징조이면 밥에 윤 기 가
나고, 불 길 한 징조라면 밥이 거칠어지리라.”
이때부터 쇠솥으로 점치는 풍습이 생겼으며, 우라의 영혼은 기비츠
히코 신사 본전 귀문 (
鬼門, 귀신이 있다고 믿는 방위)
에 있는 미사키궁民御쁘
宮에 모셨다. 우 라 가 쌓 아 근 거지로 삼 은 성으로 알려진 키노조성은 이
일대 최대 규 모 를 자랑한다. 일정한 간격으로 나 무틀을 대고 흙 을 부은
뒤 한 층 한 층 다지는 판축 기 법을 사용했는데, 이는 일본에서는 좀처 럼
볼 수 없는 특 이 한 양식이다. 그뿐 아 니라 키노조성은 토 성 을 먼저 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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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로 바깥을 보강한 성이다. 백제의 수도 부여에 자리한 나성羅城의 축성
방법과 같다. 백제 토목 기술이 기비 지역에 그대로 전해졌던 것이다. 백
제 양식의 성을 쌓고 살던 우라는 전설에서도 백제 왕자를 자처하는 인
물로 나온다.
이러한 우라의 세력이 미쳤던 기비 지역의 한 마을에서는 ‘이만三萬’
이라는 글자가 적힌 표지판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마을 사람들에 따르
면, 이 지역에서 덴지왕이 백강구 전쟁에 참전할 2만의 병사를 모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곳 인구는 현재도 1만 명을 넘지 않는데, 어떻게
1300년 전 병사 2만 명을 모을 수 있었을까?
그 해답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철 생산지였던 기비 지역의 역사에
서 찾을 수 있다. 최고 수준의 제철 기술을 지닌 백제인이 건너와 크게
번성한 곳이 바로 기비 지역이다. 그래서 예부터 일본인들은 이곳을 ‘최
고의 철을 만드는 기비’ 라불렀다.
일본 학자들도 앞선 제철 기술을 보유한 많은 한반도 사람들이 기비
지역에서 사철沙鐵과 철광산을 개발해 철을 생산했다고 인정한다. 앞서
살펴본 전설의 우라도 한반도에서 온 제철 기술자 또는 제철 기술자 집
단을 데리고 온 유력자였다는 설이 있다. 제철 기술을 기반으로 기비의
중심 세력이 되었지만, 조정에 의해 정복당했다는 설명이다. 이와 관련
해 전설에 나오는 ‘쇠솥’ 을 주목하기도 한다.
물론 일각에서는 기비츠히코 노미코토와 우라의 전설 그리고 제철
기술을 곧바로 연결 짓기란 다소 무리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기비츠히코
노미코토는 고레이孝靈왕의 아들로 알려져 있는데, 고레이왕은 기원전 3
세기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 학계도 우라가 제철 기술을 기비
지역에 들여온 도래인 호족 세력이라는 데는 대체로 동의한다.
우리말로 그대로 옮기면 ‘귀신의 성’ 이 되는 키노조만 해도 일본 학
백제 부흥의 꿈, 백강구 전투의 비밀 29
호고의 츠쿠리야마 고분은 길이 약 360(
11,높이 약 30 巾로 네 번째로 큰 일본 고분이다(
왼쪽)
. 백제
의 굴식 돌방무덤 양식인 점으로 미루어 백제 도래인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백강구 전투에서 무사 귀환한 백제 도래인이 히로시마에 창건한 삼곡사. 지금은 그 절터와 탑만 남아
있다(
오른쪽)
. 조국의 재건과 부흥을 간절히 기원한 마음이 느껴진다.
계는 백강구 전쟁에서 패한 뒤 당나라와 신라의 침공에 대비해 쌓은 성
으로 본다. 기록이 전무해 키노조성의 축성 연원을 정확히 알기는 힘들
지만, 양식으로 따져볼 때 백강구 전쟁 시기에 해당한다. 아마도 오래전
기비 지역 백제계 도래인이 일종의 방어 시설을 축조했다가, 백강구 전
쟁 패배 이후 좀 더 보강 공사를 하지 않았을까 싶다.
한편 기비츠히코 신사에서 6킬로미터 떨어진 곳에는 오카야마현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일본 전체에서는 네 번째로 거대한 츠쿠리야마造山 고
분이 자리한다. 높이가 30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무덤에는 기비 지방을
다스린 수장이 묻혔으리라 추정된다.
그런데 이 고분은 전형적인 백제 굴식 돌방무덤〔
橫穴式 石室墓〕양식
이다. 주변의 크고 작은 여섯 개의 고분은 츠쿠리야마 고분에 잠든 수장
의 일족이 묻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문화재 전문가들은 이 고분이 토기
와 철 제작 집단을 중심으로 세력을 얻은 호족의 무덤으로 본다. 백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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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래인의 무덤일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다.
백제 패망과 부흥 운동 소식은 이
호令쉐
곳 기비 지역 백제 도래인에게
오카야마
히로시마
牟
째
도 전해졌다. 고국 백제의
후쿠오카
멸망은 결코 두고 볼 수
(
스
’
'에히메
없는 일대 사건이었고, 백
제를 구하기 위한 파병에
-:.,
'구마모토
워 /》
':三- 三:"7
백강구 전투에 적극적으
동참할 수밖에 없었다. 백강
구 전쟁에 적극적으로 나선
로 나선 오카야마, 구마
모토(
히고)
, 에히메(
이
/
요)
, 후쿠오카, 히로시마,
지역은 비단 오카야마만이 아니
시가는 모 두 역사적으로
다 . 《일본서기》에는 또 다른 파병군 출신 지역인
역이다.
백제와 연고가 깊은 지
히고肥後와 이요伊子가 기록되어 있다. 히고는 지
금의 구마모토態本이며, 이요는 에히메의 옛 이름이다. 이들 두 지역 역
시 역사적으로 백제와 깊은 관련이 있는 곳이다. 이렇듯 백강구 전투를
위한 병력과 물자는 백제와 연고가 깊은 지역에서 동원했다. 스러져가
는 고국을 구해야겠다는 백제 도래 인의 일념 이 아니 라면 결코 불가능했
으리라.
이 지역 백제 도래인이 백강구 전쟁의 승리를 얼마나 염원했는지 히
로시마현 미요三次시에 남아 있는 삼곡사 터에서 알 수 있다. 본래 이 절
은 백제 도래인이 세웠다고 알려져 있다. 이 지방 수령이 백강구 전쟁에
참전하면서 ‘무사히 돌아오면 절을 세우겠다’ 고 약속했고, 백제에서 돌
아오면서 홍제私濟라는 백제 승려를 데려와 절을 창건했다. 일본 열도에
서 고국을 잊지 않고 살아가던 백제 도래인, 그들은 이미 꺼져버린 백제
를 살리 기 위해 온힘을 다했다.
백제 부 흥 의 꿈, 백 강 구 전 투 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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